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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공대생
서양 중세 봉건제의 특징 - 프랑스, 영국, 독일을 중심으로 본문
독일의 대학자인 칼 마르크스는 인류의 역사가 원시 공산사회, 고대 노예제사회, 중세 봉건사회, 근대 부르주아사회, 공산주의 사회라는 다섯 단계를 거치며 발전한다는 “역사발전 5단계설”을 주장하였다. 유럽사에 이 관점을 대입해보면 고대 노예제사회 단계는 그리스·로마 시대에 해당한다. 서로마가 멸망한 476년 이후 8세기 즈음 유럽 전반에는 그 다음 단계인 봉건제의 바람이 부는데, 이 글에서는 불·영·독에서 발전한 봉건제를 왕권에 중점을 두어 다룰 것이다.
우선 로마 멸망과 봉건제 탄생 사이 3백년의 공백이 왜 생겼는지를 짚고 넘어가자. 피렌느의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담긴 책 “마호메트와 샤를마뉴”에 따르면, 이것은 이슬람 제국이 750년 경 지중해를 점령하여 카롤링 왕조를 콘스탄티노플과 교류할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이슬람의 세력 확장은 프랑크 제국의 상공업을 축소시켰고, 농업 경제만으로는 관료와 상비군을 유지할 만큼의 재정을 마련할 수 없었다. 따라서 왕권이 약화되었고 왕은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하여 본인의 영토를 기사들에게 나눠주며 충성을 얻어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왕권이 비교적 강했던 메로빙 왕조 시기가 아닌 3백년 후의 카롤링 왕조 시기에 “지배계층인 기사들 간에 봉토를 매개로 하여 맺어지는 쌍무적이며 사적인 주종관계에 기초한 서구 중세의 정치제도”인 봉건제가 탄생하였고, 이후 프랑스에서도 10세기 즈음에 이런 전형적인 봉건제가 자리잡게된다.
여기서 엄연히 영토를 다루는 제도가 “사적”이라는 말이 동양사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낯설게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서양에서는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이 맺어지기 전까지 국가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는 봉건제의 사적인 특징을 앙주제국의 존재와 백년 전쟁의 발발 계기에서 엿볼 수 있다. 1154년, 영국의 왕으로 헨리 2세가 즉위하면서 플란타지네트 왕조가 개창된다. 그는 봉토와 영토로서 프랑스의 앙주, 노르망디, 아키텐을 소유하게 되는데, 이는 프랑스의 절반 가량에 해당하는 영역이다. 영국의 왕이 프랑스에서 이렇게 많은 토지를 가진다는 것은 봉건제가 사적인 특성을 가지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한편, 프랑스 왕 필립 6세는 그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신종 서약의 시정을 요구하고, 영국의 왕인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왕위를 요구하는 것으로 맞섰다. 이는 백년전쟁의 표면적 계기가 되었는데, 한 국가의 왕이 다른 국가의 왕위를 요구하는 상황을 통해 그때까지 유럽에서는 국가라는 개념이 형성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영국에서는 프랑스보다 100여년 뒤에 봉건제가 자리잡는다. 1066년, 노르망디 공국의 정복왕 윌리암은 영국을 복속하고 노르만 왕조를 개창하였다. 그는 영국의 영토를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프랑스의 사례를 따서 봉건제를 도입하였다. 즉, 영국의 봉건제는 프랑스와 달리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닌 의도적으로 수입된 것이다. 특히 그 주체가 권력자인 왕이었기 때문에, 영국의 봉건제는 프랑스의 그것보다 왕권 강화에 유리한 형태로 변형되었다. 한편, 독일은 그 인문지리적 특성 때문에 봉건제의 발전이 미미했다. 그들의 영토는 애초에 게르만족의 여러 부족들이 자생적으로 자리잡고 있던 곳이었다. 따라서 제후의 토지는 황제로부터 받은 봉토보다는 조상전래의 자유세습지가 더 많았다. 뿐만 아니라, 독일의 왕은 제후의 견제에 대항하기 위해 교회에 크게 의존하였다. 오토 1세는 황제로 대관하였고 스스로가 로마제국을 계승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에 따라 옛 로마의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영토를 확장하려하였고 이는 교황과의 대립을 야기했다. 이 두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독일은 왕권이 약한 정치체제를 가졌으며 봉건제의 관철은 미미하였다.
앞서 우리는 불·영·독의 봉건제를 왕권 강화의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봉건제는 단기적으로는 왕권의 약화를 드러낸다고 보이지만 장기적으로는 토지의 소유권을 왕에게 귀속시켜서 왕권의 장기적 유지에 도움이 된다. 따라서 중앙집권국가로 발전하는데 있어서 봉건제는 필수적이다. 실제로 왕권 강화적 봉건제를 가졌던 영국은 세 국가 중 가장 먼저 근대국가로 전환되었고, 봉건제가 발전하지 않았던 독일은 가장 늦게 통일국가가 된다. 곧바로 이는 산업혁명의 성공 여부로 이어진다. 산업혁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각 지방의 유용한 요소를 하나로 묶어주는 “국가”라는 개념이 필수적이다. 따라서 산업혁명에 성공하는 순서도 영국, 프랑스, 독일 순서이다. 이처럼 근대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세의 봉건적 역사에 대한 심도깊은 이해가 반드시 선행되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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