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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서양사

루터의 종교개혁: 서양 근대의 시작

친절한공대생 2018. 8. 1. 17:00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는 비텐베르크성 교회 대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내걸었다. 천년에 걸친 중세시기를 끝마치고 근대의 시작을 알리는 종교개혁이 문을 연 것이다. 혹자는 종교에 관한 사건이 어떻게 근대의 시작이 될 수 있냐고 질문할지 모르겠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근대의 시작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의 사회적 배경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종교적 측면과 정치적 측면이 있다. 첫째, 종교적 측면으로는 신비주의의 대두를 들 수 있다. 13세기의 기독교는 이성을 통해 신을 이해하려는 신학과 거대해진 교황청, 위압감있는 고딕 양식으로 상징되었다. 이는 신도들의 종교적 갈증을 해결할 수 없었고, 그에 따라 성경 그 자체와 직관을 통해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하나가 된다고 주장하는 신비주의가 확장되었다. 신비주의는 각 개인이 성경을 통해 신과 직접 접촉할 수 있으며 외적인 의식은 중요치 않다고 말하였다. 이는 교회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야기하여 종교개혁이 발생할 수 있는 초석을 마련하였다. 둘째, 정치적 측면으로는 교황에 대한 왕과 영방군주의 도전이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는 이미 14세기에 교회에 대한 과세, 삼부회 소집 등을 통해 왕이 교회의 권한을 앞질렀다. 교황청은 110년간 아비뇽 유수, 교회의 대분열 등 고초를 겪으며 권위를 크게 잃었다. 이러한 현상은 신성로마제국의 대제후가 루터를 교회로부터 보호할 수 있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두 측면의 배경은 1520년에 루터가 배포한 3개의 팜플렛에 잘 반영되어있다. 먼저 8월에 배포된 “독일 그리스도교 귀족에게 고함”에서 루터는 교회 세력과 세속 세력이 모두 영적 계급에 속하며 독일의 막대한 자산이 쓸모없이 교회로 유출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는 신성로마제국의 통치자들에게 교회의 세속적 권력을 박탈하라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교황에 대한 연방군주의 도전이라는 종교개혁의 정치적 배경을 잘 드러낸다. 둘째, 10월에 배포된 “교회의 바빌론 유수”에서 그는 7성사 중 오직 세례와 성찬만이 근거를 가진다고 주장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근거란 신약성서에의 명기를 말하는 것으로, 성경 자체를 중시하는 신비주의적 관점을 잘 드러난다. 한편 이 주장은 사제만이 진행할 수 있는 성사의 권위를 무너뜨려 교회의 권력을 공격하는 효과도 있다. 셋째, 11월에 배포된 “그리스도 교도의 자유”에서 그는 참된 자유란 율법과 계명에서 해방된 자유이며 신의 말씀은 성서임을 주장한다. 여기에서는 루터의 신비주의적 관점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며, 인간은 선행이 아닌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sola fide) 구원된다는 예정설이 암시되어있다.


 다시 1517년으로 되돌아가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의 내용을 살펴보자. 당시 교황은 성베드로 성당을 짓기 위해 면죄부를 할당량만큼 판매할 것을 각 국가에게 요구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독일이 그 양이 많았다. 이에 루터는 예정설과 신비주의, 그리고 정치적 상황을 바탕으로 반박한다. 우선 인간의 작은 행위인 면죄부 구매가 신이 이미 정해놓은 구원 여부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교회의 주장을 예정설자인 루터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또한, “교회의 진정한 보물은 복음이다”라는 말을 통해 신비주의적 관점으로 면죄부 판매를 비판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가난한 이웃과 자신의 가족을 무시하고 그 돈으로 면죄부를 사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행위라고 지적하며 “교황의 젖소”라고 놀림받던 당시 독일의 정치적 상황을 간접적으로 언급한다.


 이제 왜 루터의 종교개혁이 근대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인지에 대한 결론을 지어보자. 보헤미아의 얀 후스 역시 이를 바탕으로 교황의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다가 이단으로 몰려 1415년에 화형당하였다. 같은 내용의 주장이었음에도 관철 여부가 달랐던 것은 바로 대제후의 권력 차이 때문이다. 후스 때와는 달리 루터의 종교개혁 당시에는 삭소니 대제후의 권력이 교황과 맞먹을 정도가 되어 루터를 보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루터의 종교개혁은 독일이 왕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국가로 성장하고 있었음을 상징한다. 물론 영국과 프랑스는 한참 전에 왕권이 교황권을 앞섰지만 유럽 전체로 보자면 가장 그 시기가  늦은 독일의 사례를 근대의 시작으로 보아야 마땅하다. 그리하여 루터의 종교개혁은 근대 사회의 -마르크스에 따르면 그로 넘어가는 과도기인 절대주의 시대의- 시작으로 보아야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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